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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보호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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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3-14 11:28 조회4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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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했다. 지난해 12월23일 헌법재판소가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진술이 담긴 영상은 진술 당시 피해자와 동석했던 신뢰관계인의 증언이 있으면 증거로 쓴다”라는 법률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는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설마 헌법재판소가 십수 년째 정착한 이 중요한 제도를 공개 변론도 열지 않고 ‘단순위헌’ 결정으로 단칼에 날려버렸다니. 법정에 연이어 불려나갈 어린 성폭력 피해자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헌법재판소는 ‘영상으로만 피해자의 진술을 들으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침해된다’고 했다. 갸우뚱했다.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 영상과 녹취록이 이미 증거로 제출되었더라도, 더 물어볼 것이 있다며 기어이 피해자를 법정에 부르는 경우가 여태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지원했던 한 중학생 특수강간 피해자는 사건의 충격으로 가족 모두 이민을 갔다가, 증언 때문에 임시 귀국을 한 적도 있다. 기존에도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은 잘 보장되고 있었다. 참고로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헌법’에 직접 적어 놓았지만, 일정한 요건하에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이 담긴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사용하고 있다. 

이 결정을 이해해 보기 위해 다수 의견이 제시한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보호 대안을 살펴보았다. 

첫째, “증거보전제도를 적극 활용하면 된다”고 한다. 증거보전제도는 법원의 판사가 사건 초기에 미리 증거조사를 하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형사사건은 경찰과 검찰을 거쳐 법원의 판사가 나중에 개입하기에, 증거보전 신청을 해도 기각률이 높다. 최근 인천 층간소음 살인미수 사건의 피해자들이 법원에 CCTV 영상 증거보전 신청을 했지만, 법원은 기각했다. 경찰을 통해 입수하라는 것이다. 낯설고 잘 쓰이지도 않는 이 증거보전제도를 대체 어떻게 활용해야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둘째, “증인을 보호하는 제도를 잘 활용하면 된다”고 한다. 신상정보나 사생활 노출 위험 방지를 위해 재판을 비공개로 하고,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누설하지 않으며, 증언할 때 피고인을 퇴정시키고 비디오 등 중계장치로 증언할 수 있게 하고, 피해자가 증언할 때 옆에 신뢰관계인을 같이 앉을 수 있도록 하고 있는 지금의 제도들을 잘 활용하면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는 보호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폭력 피해자 진술 영상녹화제도의 도입 취지를 폄하하는 관점이다. 성폭력 피해 아동이 전문 조사자 앞에서 있었던 일을 최대한 자세히 말하고, 그 말하는 과정을 전부 영상녹화하여, 법원은 그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보고 심리할 수 있는 제도였다. 아동이 영상 진술 후, 일상에 복귀하여 회복에 전념하도록 한 것이 이 제도의 본질이다. 법정에 불려나가 또다시 피해를 증언하는 아동은, 사건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당시 느꼈던 감각과 감정까지 끌어올려 제 입으로 말해야 한다. 이 상황의 아동 피해자에게 증인보호제도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2차 피해가 없도록 재판 진행을 잘하면 된다”고 한다. 물론 재판부는 증인신문 시 소송지휘권이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변호사는 검찰과 피고인 측의 증인신문사항을 받아볼 수도 없다. 그래서 수많은 피해아동들은 법정에서 ‘네가 자초해서 혹은 기여해서’ ‘합의금 노리고’ ‘평소 문란해서’ 등의 공격을 무방비로 맞닥뜨린다. 재판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2차 피해도 심각하다. 한참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반복적인 사법절차에 끌려다니며 겪는 학업 부적응, 부정적인 소문의 확산 등 증폭되는 피해를 경험하는 아동들은 피해 자체보다 오히려 이 2차 피해에서 더 큰 고통을 겪기도 한다. 결국 2차 피해는 소송지휘권과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사실상 대안이 없는데 보완입법도 없기에, 성폭력 피해 아동은 법정에 나가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회에 미래는 없다.

 

출처: 경향신문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12403000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