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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열악한 아동보호전담요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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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3-14 11:42 조회4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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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될 때, 전환 전후의 에너지 총합은 항상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 이 법칙의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덥더라도 냉장고를 열어 두지는 않는다. 냉장고 문 앞은 잠깐 시원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만큼의 열에너지가 냉장고 뒤쪽에서 더 발생해서 공간은 더 더워지기 때문이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에너지 보존법칙은 어떤 ‘사건’에 투여되는 에너지에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듯하다. 가령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하면 누군가는 현장 조사를 하고, 누군가는 그 아동에게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찾아 연결한다. 피해 아동의 변호인인 나는 수사기관을 비롯한 여러 유관기관들과 협력해 아동에게 필요한 법률 지원을 한다. 

사건은 연일 장맛비처럼 쏟아지는데 그 일들을 나눠서 담당하는 사람의 숫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한 사건에 에너지를 과하게 쏟을 경우, 다른 사건은 그만큼 본의 아니게 소홀하게 될 수 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 뛰어다니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현장을 잘 반영하는 제도를 설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년 10월부터 아동보호체계가 전격 공공화되면서 기존에 아동보호전문기관이 하던 일의 절반 정도를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이 수행하고 있다. 학대사건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동보호계획이 필요한 사건들 역시 증가하고 있어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이 있으니 이른바 ‘아동보호전담요원’이다. 

아동복지법에는 그냥 ‘민간전문인력’이라고 쓰여 있지만, 지침이나 보도자료 등에서 ‘아동보호전담요원’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 ‘요원’을 영화 <킹스맨>의 ‘에이전트’라도 되는 듯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칙대로 하면 아동보호전담요원은 아동복지전담공무원의 업무를 지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동복지전담공무원을 두는 것은 법적으로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없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아동복지전담공무원 업무는 사실상 아동보호전담요원의 업무가 된다. 

아동에 대한 상담 및 보호조치, 아동의 가정환경에 대한 조사는 기본이다. 아동복지시설에 대한 지도·감독도 해야 하는데 시설아동뿐 아니라 가정에 위탁한 아동도 살펴야 한다. 지난 3월30일부터 졸속으로 시행된 학대피해 아동 ‘즉각분리제’로 분리되는 아동이 많아졌다. 이런 아동들이 가정에 복귀된 경우 그 가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모니터링하고 사후관리를 하는 중요한 업무도 아동보호전담요원이 해야 한다. 게다가 6월30일부터는 아동을 직접 기를 수 없어서 입양을 보내고자 하는 경우, 임신한 미혼모를 비롯한 생부모 그리고 아동을 상담하는 업무까지 별안간 추가되었다. 

놀라운 점은 이 중요한 업무들을 전국에서 겨우 300명 정도의 아동보호전담요원들이 꾸역꾸역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 비밀요원이라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업무량이다. 절망스러운 것은 이 아동보호전담요원의 처우이다. 법률에 없는 명칭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없다. 

아동보호전담요원은 대부분 시간선택제 직원 또는 드림스타트(취약계층 아동 통합서비스 지원사업)에서 전환된 무기계약직 직원이다. 단순 기간제 직원으로 채용되기도 한다. 합리적인 보수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전문성은커녕 오래 일할 수조차 없는 열악한 구조라는 뜻이다. 

큰 권한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아동보호 실무 현장에 들일 수 있는 한정된 에너지를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법을 바꾸면 이렇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결과가 생긴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을 갈아 넣을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아동 최상의 이익’에 부합하는 현장 작동을 바라는 것은 한마디로 도둑 심보이다. 아동 한 사람의 인생을 차분히 볼 수 있도록 현장 인력 수급과 업무 분장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설계해야 한다.

 

출처: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8020300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