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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피해자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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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3-14 11:44 조회4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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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 회의를 마치고, 당시 검찰총장과 다 같이 오찬을 하게 되었다. “검찰을 위한 쓴소리는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시기에, 초면이지만 사뭇 진지하게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총장님, 검찰 콜센터인 1301에 직접 전화를 걸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세부적인 사항까지 모두 보고를 받을 수 있기에 굳이 콜센터에 직접 전화를 할 이유는 없었으리라. 왜 묻는지 다들 궁금해하기에 밝은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혹시 짧은 시간을 들여 갑자기 기분을 망치고 싶을 때가 있으시면, 한번 이용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참석자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무렵, 검찰 콜센터가 범죄 피해를 당한 피해자를 대리하는 변호사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법적으로 피의자와 검사만 형사절차의 당사자이기에, 피해자는 할 말이 많아도 제3자이다. 그래서 형사사법포털 사이트로 사건진행상황을 알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피해자와 그 대리인은 요즘 같은 시대에도 오직 전화 통화를 통해서만 사건의 진행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성폭력, 아동 학대, 장애인 학대 피해자에게 국가에서 변호사를 선정해주는 ‘피해자 국선변호사’제도가 시작된 지 올해로 십년이다. 법무부에서 운영하지만, 실무는 지방검찰청을 통해 돌아간다. 사실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는 잘만 작동되면 참 좋은 제도이다. 피해자가 못 구했던 증거를 찾은 적도 있고, 수사기관이 놓쳤던 추가 범죄 사실을 발견하여 가해자를 구속하기도 했다. 피해자 삶의 굴레를 잘 이해하면 반복되는 피해의 악순환을 끊도록 사회복지 지원체계도 연결할 수 있다. 

피해자 국선사건만 처리하며 월급을 받는 국선 ‘전담’변호사가 아닌 ‘비전담’ 변호사의 명단은 지방검찰청마다 따로 관리하고 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 지정 신청이 들어오면 그 명단 속 변호사들에게 사건을 배당하면서 피해자 지원이 시작된다. 

수년간 장애인, 아동 등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피해자만 대리하여 무료로 지원하고 있기에 당연히 피해자 국선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다. 사건진행상황 확인을 위해 검찰 콜센터에 전화하여 ‘피해자의 국선변호사입니다’라고 해도 ‘검찰청에서 받은 국선변호사 선정서와 신분증 사본을 팩스로 보낸 후 15분 기다렸다가 다시 전화를 달라’ 한다. 팩스를 보내고 난 후에도 사건번호나 해당 검사실의 호수, 전화번호 등 기본적인 사건 정보를 얻기까지 최소 5분, 길게는 30분이 넘게 걸린다. 본인확인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가능함에도 가장 불편한 방식으로 사건 정보에 접근하게 함으로써 안 그래도 마음이 얼어 있는 피해자의 정보 접근권을 지레 포기하게 하는 형국이다. 

물론 이 활동을 하면 약간 돈이 나온다. 그런데 이 돈을 받기 위한 보수청구 역시 만만찮다. 상담과 참여는 한 장씩 서명을 받아 입증해야 한다. 사건당 최소 몇 시간이 드는 사건진행상황 확인 시간이나 피해자 지원체계를 연결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시간은 보수를 청구할 방법이 없다. 

나의 경우는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도 아니고 원래 수임료 없이 매우 취약한 상황의 피해자만 무료로 법률지원을 하고 있기에 터무니없이 낮은 보수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전담’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사건당 몇 백만원의 수임료를 받는 사선변호사 업무도 병행하는 것을 감안하면, 과연 이대로 보수기준을 가져가는 것이 괜찮은지 실로 의문이 든다. 

보수가 적으면 행정절차상의 번거로움이라도 적어야 할 텐데 ‘낮은 보수’와 ‘잡무 폭탄’은 몇 년째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 중이다. 지속불가능하게 망가진 제도는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할 때도 있다. 더 늦기 전에 진짜 피해자를 위한 국선변호사 제도가 되도록 과감한 평가와 개선이 필요하다.

 

출처: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7050300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