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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나에게 맞는 언어를 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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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3-14 11:46 조회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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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인 일요일 오전, 사이렌이 울린다. 묵념을 하고 나니 추념식 화면이 들어온다. 화면 귀퉁이에 자리 잡은 수어통역사의 손이 표정과 함께 분주하게 움직인다.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일부 개정안에 의하면 6월4일부터 정부 주관 기념일 행사는 반드시 한국수어 통역이나 점자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기존에는 국경일과 일부 기념일에만 수어 통역이나 점자자료가 제공되었지만, 이제는 3·15의거 기념일을 비롯해 정부가 정한 53개 ‘모든 기념일’에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수어와 점자는 대표적인 ‘정당한 편의’이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은 이 정당한 편의를 ‘장애인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동등하게 같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애인의 성별, 장애의 유형 및 정도, 특성 등을 고려한 편의시설·도구·서비스 등 인적·물적 제반 수단과 조치’라고 규정하고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똑같이 누릴 수 있도록 제공되는 모든 것’을 정당한 편의라고 볼 수 있다. 

“거 참 유난스럽기는! 자막 보면 되잖아?” ‘방송에서 수어통역을 늘려달라’는 집회 현장에서 한 시민이 지나가며 냅다 지른 말이다. 수어가 언어인 청각장애인에게 글자로만 화면을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다 수영에 능숙한 사람에게 오로지 자유형만 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설명할 새도 없이 그 사람은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장애인이 권리로 누려야 하는 ‘정당한 편의’가 ‘유난스러운 일’로 오인되면서, 일상 속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카페에 들어가며 출입 QR코드를 찍고 싶어도 도저히 혼자서 할 수 없다. 수기명부 작성도 거의 불가능하다. 보고 듣는 일뿐이랴. 골목마다 있는 1층 편의점의 80%가 입구에 경사로가 없어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들어갈 수도 없다. 

2050 탄소중립위원회 출범식에서 대통령의 격려사는 수어통역 없이 방송되었다. 수어의 빈자리는 ‘자동자막’으로 대체되었지만 듣도 보도 못한 외계어로 채워지는 자막에 헛웃음이 나오면서 미국의 판결이 생각났다. 작년 9월 워싱턴DC 연방법원은 ‘백악관에서 코로나19 브리핑 시 수어 통역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이 소송을 대응한 미국 법무부는 ‘폐쇄자막이 있어 수어 통역이 따로 필요 없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어는 음성언어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선심 쓰듯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면서 무례하게 일방적인 경우도 많다. 점자를 쓰는 시각장애인, 수어를 쓰는 청각장애인이 전체의 10%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 외의 정당한 편의는 인정할 수 없다는 걸까. 저시력 장애인에게는 화면 확대가, 저청력 장애인에게는 음성 증폭기가 더 필요한 편의이지만 일방적으로 수어와 점자만 제공하고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이다. 

 

제대로 된 정당한 편의 제공의 시작은 ‘물어보기’다. 상대방이 편하고 익숙한 방식에 ‘맞춰서’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 강의에 세 명의 청각장애인이 온 것을 확인하고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수어를 쓰는 분을 수어통역사 앞자리로 옮겨드렸다. 한 분은 인공와우를 통해 전기적 자극으로 소리를 인지하기 때문에 스피커에 너무 가까이 앉지 않도록 자리를 앞줄 가운데로 옮겨드렸다. 다른 한 분은 보청기를 사용하시기에 소리 자극이 잘 오도록 스피커 가까이에 앉도록 했다. 이제 조심할 것은 속도와 발음이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면서 입모양을 정확히 만들어 강의하면서 세 명의 청각장애인은 모두 강의 내용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미리 물어보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방의 언어를 물어볼 때 정당한 편의는 유난스러운 일이 아닌 권리가 된다. 나에게 중요한, 사소한 것들도 존중받을 수 있도록 먼저 물어보는 연습을 하는 것은 어떨까.

 

출처: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60703000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