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병변 장애인 K 씨는 지난 4월 한 지하철역에서 길거리 경품 추첨 이벤트에 참여했다. 화장품 생산 대기업 '코리아나'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였다. 코리아나 본사 영업직 직원 A 씨는 K 씨에게 '개인정보를 기재하면 추가 경품을 준다'라고 안내했고 K 씨는 이에 응했다.
며칠 후 K 씨에게 전화가 왔다. 이벤트 3등에 선정되었으니 상품을 방문수령하라는 연락이었다. 그러나 사무실을 찾은 K 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경품'이 아니라 빚이었다. A 씨는 K 씨에게 840만 원에 달하는 화장품을 구매하게 했다. 카드 한도가 초과되자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던 신용카드 발급 신청서까지 내밀었다. 결국, K 씨는 신용카드를 2장 더 만들어 대금을 모두 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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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씨가 구매한 화장품. 아직 받지 못한 화장품까지 총 840만 원을 결제했다. 사진제공 K 씨 어머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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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강매뿐만이 아니었다. A 씨가 K 씨에게 판매한 화장품은 주름개선, 미백, 영양 크림 등 고기능 제품이 대부분이었고, 기능이 중복되는 화장품도 많았다. 심지어 결제한 화장품이 모두 온 것도 아니었다. 코리아나 화장품 판매책자에 나온 대로 계산해 보면, K 씨가 받은 화장품은 약 400만 원가량에 불과했다. 화장품을 사면 마사지를 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1주일에 1회 하는 마사지를, K 씨는 이틀에 한 번꼴로 불려갔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K 씨의 어머니는 코리아나 사무실을 찾아가 환불을 요구했으나 "성인인 당사자가 동의하고 구매한 것이므로 환불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K 씨의 어머니는 고객센터, 마케팅팀 등에 수차례 민원을 넣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모두 같았다. '성인이시잖아요'. 성인이 스스로 결제한 것이기 때문에 환불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된 문제 제기에 코리아나 측은 결국 '개봉한 화장품은 제외하고' 결제 취소를 했다. 총 결제대금 840만 원 중 취소된 금액은 640만 원 가량이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사고로 6개월간 혼수상태에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장애를 갖게 됐는데, 의사 선생님이'뇌병변으로 등록할지 지적장애로 등록할지 선택하라'고 하더군요. 둘 다 해당한다고. 저는 뭘 잘 모르니까...'지적장애'로 등급을 받으면 사회생활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돼서 그냥 뇌병변장애로 등급 신청을 했어요."
K 씨는 보행장애와 언어장애가 있다. 학교에서 늘 괴롭힘을 당했다. 차별과 폭력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계속됐다.
"사기 당한 게 이전에도 더 있었어요. 딱 봐도 애가 어수룩하고 만만해 보이니까...도움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이용해 먹을 생각 말고 가만히 내버려만 뒀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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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나 사무실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K 씨의 어머니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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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접한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아래 한뇌협)는 7일, A 씨가 근무하고 있는 코리아나 뷰티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A 씨와 마케팅팀장 B 씨 등 2명을 사기죄로 고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승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르면,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동등한 선택권을 보장받는데 필요한 서비스를 지원받아야 한다. 또한, 장애로 인해 유기나 학대, 그리고 금전적 착취를 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장차법에 명시되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 활동가는 "그러나 K 씨는 장차법에 보장된 정당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금전적 착취도 당했다"라며 "이는 코리아나가 고객을, 특히 장애인 고객을 '호구'로, 돈벌이 수단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비판했다.
K 씨의 법률대리인으로 나선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코리아나 측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성인이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므로 우리는 잘못이 없다'는 것인데, 이런 논리라면 장차법이 대체 왜 만들어졌겠나"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김 변호사는 "상식적으로도 이십 대 후반 남성에게 필요 없는 화장품을 천만 원 가까이 사게 하고, 집요하게 결제하고, 이에 항의하는 가족들에게 사과는커녕 책임을 당사자에게 미루는 행위는 중소기업이건 대기업이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을 마치자 B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B 씨는 "결제한 것 다 취소했는데 사무실 앞에서 왜 이러냐"라고 항의했고, "곧 본사에서 고위 담당자가 올 것이니 대표 한두 명만 남아서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다. 800만 원이 넘는 화장품을 K 씨에게 판매한 이유에 대해서는 "장애인인지 몰랐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K 씨의 어머니는 "내가 그렇게 찾을 때는 전화 통화도 못 하던 담당자가 이제서야 만나자는 건가"라며 "이야기할 것 없다. 예정대로 고소장을 접수할 것"이라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B 씨의 항변에 대해 "판례를 보면, 취소를 했더라도 결제를 한 그 시점에 이미 사기 행위는 완결된 것"이라며 사기죄 성립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보행장애도 있고 언어장애도 있는 K 씨가 '장애인인지 몰랐다'라는 B 씨의 변명에 더욱 화가 났다.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여 장애인을 손쉬운 범행 대상으로 여기는 사회에 경종을 울릴 것"이라고 밝혔다.
K 씨 측은 코리아나 영업사원 A 씨와 팀장 B 씨에 대한 고소장을 서초경찰서에 접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