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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자문] 어린 피해자의 트라우마 헤집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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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7-08 14:04 조회4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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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진술 영상, 법정에서 증거로 못 쓴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로서 고등학생 때 가해자 형사재판에 증인으로 선 적이 있는 이선희(가명·24)씨는 2021년 12월23일 이런 뉴스를 접하고 분노했다. 헌법재판소는 이날 미성년 피해자의 진술이 담긴 영상물을 피해자의 법정 증언 없이 증거로 쓸 수 있게 한 법률(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30조 6항)을 6 대 3 의견으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까지 미성년 피해자는 법정에 거듭 불려나오지 않아도 됐다. 수사 단계에서 영상 녹화 조사를 받으면 그 영상물을 증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재 결정으로 가해자가 영상물을 증거로 쓰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피해자들은 꼼짝없이 법정에 불려나가게 됐다. 여성단체와 법조계에서 두루 비판이 쏟아졌다.

 

 

피해 사실 의심받고 모욕당하고
형사소송 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라 주변인의 위치에 머무른다. 국가의 형벌권과 피고인의 방어권이 대립하는 가운데 피해자는 일종의 ‘증거’로서만 존재한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는 진술의 진위를 의심받고 모욕당하기도 한다. 설명하거나 설득하는 부담도 짊어진다. 위헌이라고 결정된 해당 법 조항은 최소한 미성년 피해자만큼은 성인 피해자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에서 만들어졌다.

 

아동·청소년보호단체 탁틴내일의 이현숙 대표는 “미성년 피해자가 수사 단계에서 영상 녹화 진술을 마치고 치유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수사·재판에 거듭 불려나가게 되면 모든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 사건 속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피해 사실이 있은 날로부터 시간이 흘러 일관된 기억을 하지 못하거나 낯선 장소에서 변호인의 공격적인 질문을 받아 형사절차를 중도 포기하는 일도 발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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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는 2021년 12월23일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영상 진술 특례조항에 6 대 3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내가 잘 설득하지 못해 낮은 형량 선고됐나”
선희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10년 동안 이복오빠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친언니가 선희씨의 피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매는 그 즉시 집을 나왔다. 가해자를 고소했고 수사기관에서의 피해 진술은 영상물에 담겼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수사부터 재판 단계까지 가족의 끊임없는 압박과 회유에 노출된다. 부모는 수사 단계에서는 “지금 제일 아픈 손가락은 너지만 ○○(가해자)가 감옥에 가면 아픈 손가락은 ○○가 될 것 같다”며 고소 취하를 종용하더니, 재판 단계에서는 증인을 자처해 가해자를 감쌌다. 가해자와 선희씨의 진술이 엇갈리자 재판부는 선희씨를 증인으로 불렀다.

 

2016년 겨울 고등학생이던 선희씨는 가해자와 분리된 통로로 법정에 걸어 들어갔다. 법원의 피해자 증인지원관과 울지 않겠다고 손가락을 걸고 난 뒤였다. 세 명의 판사와 검사, 피고인 쪽 변호인, 피해자 변호사에 둘러싸였다. 피고인은 다른 공간에 분리돼 있다고 했다. 선희씨는 심장의 떨림을 느꼈다. “제 목소리가 잘 들려야 하니까 마이크에 대고 말하래요. 저를 내려다보는 판사, 증인 선서하는 행위도 그렇고, 마이크를 대니까 목소리가 커지는데 그것조차 무서웠어요.”

 

선희씨의 증인신문 녹취서를 확인해보니 검사, 피고인 쪽 변호인, 판사는 이날 모두 122개의 질문을 쏟아냈다. 구체적인 피해 시기와 상황, 느낌에 더해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반복해서 물었다.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왜 끝까지 적극적으로 싫다고 저항하지 않았나.’ 특히 선희씨가 특정 범행의 시기를 헷갈려 하자 피고인 쪽이 강하게 추궁했고 선희씨는 결국 수사 단계에서의 진술을 번복하게 됐다. 선희씨는 재판이 끝난 뒤에도 그 점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고 한다.

 

1심에서 가해자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됐다. 친족 성폭력 사건치고 낮은 형량이었다. “피해를 당한 것도 서러운데 내 앞에 있는 이 사람들한테 ‘그때의 나는 너무 약해서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고 설득시키고 이해시켜야 했어요. 그리고 선고 결과를 보고서는 크게 자책했죠. ‘내가 잘 설득하지 못해서 가해자가 낮은 형량을 선고받은 거 아닐까’ ‘내가 왜 그걸 제대로 기억 못했지’ 계속 생각나고 후회됐어요.”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선희씨 같은 사례는 늘어나고 있다. 위헌 결정의 영향은 재판부터 수사 단계까지 크고 넓다. 6살 아동이 법정 출석을 요구받거나 부모가 피해아동의 법정 출석을 거부해 무죄 선고가 사실상 예정된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10여 년 지원한 국선변호사의 말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어떻게 결정권을 행사하겠어요. 다 피해자의 부모가 결정하죠. 내 아이가 피해를 당했다 해도 아이를 법정에 세운다는 두려움이 너무 커요. 성인도 경찰서, 법원 무섭잖아요. 더군다나 아동인데 국가가 도와주기는커녕 왜 법정에 나가야 하는지 이것부터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그럼 법정에 안 나가겠다는 대답이 돌아오고 범죄를 입증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 무죄가 나오는 거예요. 결국 용감한 자만 신고하라는 얘기인 거죠.”

 

피고인의 반대신문권과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의 중요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피고인의 방어권과 피해아동 보호를 대립하는 가치로 상정한 채 둘 사이에서 “조화로운 대안”을 찾아나가라고 주문한 헌재 결정은 범죄 피해아동의 인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법 조항이 존재할 때도 특히 16살 이상 아동은 법정에 출석하는 일이 잦았던 현실, 2013년 12월 동일한 내용의 청소년성보호법 조항에 관해서는 헌재가 합헌이라 결정했다가 8년 만에 완전히 입장을 뒤바꾼 사실 등에 비춰볼 때 아동·청소년 전문가들은 헌재의 위헌 결정을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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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27일과 3월14일 두 차례 인터뷰로 만난 친족 성폭력 피해자 이선희(가명)씨. 고한솔 기자

 

 

정서적 고통 최소화, 피해 회복 집중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범죄 피해 이후에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추가 피해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성폭력 피해뿐 아니라 범죄 피해자의 인권을 개선해야 한다는 세계적인 추세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내려진 위헌 결정이라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현장은 과도기에 있다. 4월7일 대법원 법원행정처와 여성가족부는 영상 증인 신문 시범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법정이 아닌 해바라기센터에서 영상 중계로 증인신문을 하겠다는 것이다. 재판부가 소송지휘권을 적극 행사해 추가 피해를 막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지만, 이는 해당 조항을 대체할 법이 마련될 때까지 법정에 출석할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단기 조처일 뿐이다.

 

그리고 4월14일 법무부가 대체입법안을 발표했다. 미성년 피해자가 아동친화적인 별도의 장소에서 훈련받은 전문조사관에게 진술하고 가해자 쪽 변호인을 비롯한 소송관계자들은 법정에서 영상을 통해 참관하도록 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변호인은 조사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질문하게 해 공격적인 신문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한편, 트라우마 등으로 법정 진술이 불가능하면 영상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특례를 뒀다. 범죄 피해아동에게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아동친화적인 장소에서 제공하는 북유럽의 바르나후스(아동의 집) 모델을 참고했다.

 

법무부의 대체입법안은 아직 밑그림 단계다. 충분한 예산을 확보해 전문성을 갖춘 조사관과 아동친화적인 장소 등을 확충해야 하는 만큼 어느 정도 현실화될지 미지수다.

 

게다가 이 같은 대안은 모두 피해아동에게 피고인의 반대신문을 피해갈 길을 마련해주지 못하고 여전히 추가 피해의 위험부담을 짊어지운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아동권익 보호 전문가들은 원칙적으로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행사하도록 하되 반드시 예외 영역을 두어 피해아동을 보호할 길을 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더해, 피해아동이 불가피하게 피고인의 반대신문에 응해야 할 때도 언제, 어디서, 어떤 절차를 거칠지 아동친화적인 지침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원칙-예외의 방식은)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와 맞물려 시너지도 낼 수 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피해자 상태를 면밀히 살펴 반대신문권의 예외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재판부가 ‘이 정도면 불러도 되겠다’ ‘이 정도는 부르면 안 되겠다’고 판단해나가면, 그런 기준들이 일종의 판례군처럼 형성돼 법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헌법에 반대신문권이 보장된 미국의 경우, 아동 피해 사건은 대부분 플리바게닝(감형 협상) 단계에서 끝나기 때문에 아동 피해자가 법정에 서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 또한 아동이 두려움 때문에 증언할 수 없거나 증언으로 인해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가 인정할 때 영상물로 피고인의 반대신문을 대신하는 8가지 예외를 뒀다.

 

 

소송 주변인 아닌 ‘권리의 주체’인 피해자
“종래 형사소송 절차에서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피고인의 권리 보장이라는 목적에 가려져 피해자는 주목받지 못했고, 단순한 소송의 객체로서 심리의 대상이 되었다. 피해자가 사법절차에서 새로운 위험에 노출되는 현상에 대한 대응은 최근 들어서야 주목받고 있다. 국가 형벌권 행사의 목적이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이를 통한 국민의 기본권 보호임을 고려할 때 형사소송 절차에서 피해자 보호는 경시되어서는 안 될 가치다.”

 

소수의견을 낸 헌법재판관들(이선애·이영진·이미선)의 지적처럼, 형사사법 절차에서의 피해자의 지위를 다시 돌아봐야 할 때라는 주문도 나온다. 조현주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는 “특별법으로 성범죄 피해자의 권리가 확대되면서 범죄 피해자의 권리 전반이 함께 상승해야 하는데 마치 모난 돌이 정 맞는 모양새다. 우리나라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의 지위를 어떻게 위치시킬지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