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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인권, 거창함 경계...누구나 알지만 지속이 힘든 삶의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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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3-11 10:26 조회9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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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지적 장애가 있었던 강민수(가명) 씨는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글씨도 모르고, 셈도 잘 못하는 강씨가 그나마 돈관리를 할 수 있었던 건 옆집에 사는 김애리(가명) 씨 덕분이었다. 김씨는 현금지급기도 사용할 줄 모르는 강씨가 벌어오는 월급과 장애인에게 국가가 지급하는 금액을 합해 100만원 남짓한 돈을 3년간 차곡차곡 모았다. 그러던 중 강씨는 모시던 어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게 되자 돈이 필요했고, 김씨에게 맡겨둔 돈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김씨가 돈을 모아놓았다는 통장에는 잔고가 없었다. 김씨는 강씨의 법적인 기초생활수급비 관리자였고, 주민 센터에 일일이 사용 내역을 증빙할 영수증도 냈다. 김씨는 강씨 모자 생활비로 다 썼다고 주장했다. 지적 장애가 있는 강씨는 이를 반박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강씨는 지원금 수급자인 상황에서 몰래 일을 하고 있었다는 약점도 잡힌 터였다.

강씨는 결국 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39·사법연수원 41기) 변호사를 만난 후에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김 변호사가 김씨를 준사기죄로 고소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영수증에는 강씨가 먹은 적도 없는 식품과 음료, 심지어 SUV자동차 구입 내역까지 기재돼 있었다. 이렇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과 여성, 아동에게 법률 지원을 한 사례가 1000건이 넘는다. 김 변호사는 출산 의료 사고로 어렸을 때 이미 한 쪽 시력을 잃었다.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됐지만, 돈을 버는 길을 택하지 않고 일관되게 공익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판사인 남편이 광주지법 목포지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이사를 갔다. 서울을 오가며 법안 마련 과정에도 전문가로 의견을 낸다. 아이 셋을 키우며 자택 방 한 칸을 사무실 삼아 장애인권법센터 활동을 하는 김 변호사를 지난 8일 광주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정작 김 변호사는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의식하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가 첫째고, 비교할만한 형제, 자매도 없었거든요. 좀 늦게 알았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정도 되고 나서? 한쪽 눈은 보이니까 기능상 장애로 느낀 부분은 없었는데, 사람들 표정이 다르다거나, 나를 대할 때 불쌍한 사람 취급을 하거나, 과도하게 기특하게 여긴다거나. 그런 게 어린 나이에 이상하게 느끼긴 했죠.”

김 변호사는 한 쪽 눈이 의안이라서 주기적으로 관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어렸을 때 병원을 오간 기억이 나쁘지 않다. “엄마가 따로 일을 하고 계셨거든요. 그런데 병원 가는 날은 혼자 엄마를 차지할 수 있잖아요. 장애라고 느끼기보다 오히려 좋았어요. 막상 제가 장애를 느꼈던 건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인지했을 때였어요.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인 거죠.”

하지만 공익활동에 전념하게 된 게 학창시절 느낀 소외감 때문은 아니었다. 김 변호사는 오히려 스스로를 “차별당하기에는 너무 기득권이었다”고 말한다.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목소리도 크고, 힘도 세고, 상대적으로 공부도 잘 했다. 비평준화 고교를 다니다 보니 장애인 친구도 보기 어려웠다. 김 변호사가 한 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건 출산 과정에서의 의료사고 때문이었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오래 전 일이라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효가 지난 상황이었다.

김 변호사는 “법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좋은 도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법대에 진학했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정작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사법연수원 시절이었다. 시보 시절,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장애인 사건을 경험했다.

“난민이나 이주민 문제도 생각보다 너무 심각했어요. 동기들끼리 ‘몰랐으면 모를까, 이걸 알고도 어떻게 사느냐’고 했죠. 우리가 중세시대를 사는 게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에 함께 사는 거잖아요. 거기서 오는 근본적 분노 같은 게 있었어요. 사건을 하다보니 계속 다른 사건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법안 만들 때도 참여하게 됐고요. 대단한 사명감 같은 게 있어서 한 건 아니에요.”

김 변호사는 개별 사건 법률지원 외에도 입법 과정에 참여하기도 한다. 로펌 회의실이 아닌 현장에서 의뢰인을 만나고 싶어 장애인권법센터를 차렸고, 어느 새 이 분야 실무경험이 가장 많은 법조인으로 꼽힌다. 6년간의 노력 끝에 시각장애인도 1종 운전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최근 논란이 됐던 ‘정인이 사건’ 법안을 정리하는 데도 김 변호사의 역할이 컸다. 여론의 분노를 반영해 처벌 형량을 높인 입법안이 난립했지만, 김 변호사는 형량을 높이는 게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의견을 냈고, 결국 단순히 형량을 강화하는 법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저라고 왜 화가 안나겠어요. 분노하시는 분들 마음 이해해요. 가까이서 보면 그냥 재판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화가 나지만, 피해자를 지원하는 입장에서 신중할 수 밖에 없어요. 형량이 늘어나면 수사 개시는 빨라져요. 하지만 혐의 입증 과정에서 그만큼 입증 책임이 무거워지고, 피해자가 얼마나 힘들어지는지는 사람들이 잘 몰라요. 예를 들어 가정폭력 당하는 아이가 어떤 증거를 수집할 수 있겠어요. 저처럼 피해자들과 없는 증거 끌어모으고, 설득을 해야 하는 입장에선 법정형을 높인다고 엄벌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체감하고 있거든요.”

김 변호사는 요즘도 하루에 6~7통 정도 사건 의뢰를 문의하는 전화를 받는다. 그 중 김 변호사가 개입할 필요가 있는 사건은 한 두 건에 불과하다. 차별을 당했다며 전화를 건 의뢰인 얘기를 듣다 보니 항공기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하는 도중 벌어진 일이어서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답한 일도 있었다. 그래도 한달에 40~50건을 검토해야 한다. 김 변호사는 “그래도 전화하는 분들은 극히 일부”라고 한다. 사건을 통해 돈을 벌지는 못한다. 애초에 당사자들이 보수를 줄 수 있는 여건이 못된다. 외부 강연, 국가에서 주는 입법 용역이나 자문이 변호사로서 수입원이다. 그는 오히려 “정말 어려운 분에게 집중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정인이 사건처럼 이슈가 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도움이 필요한 영역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일회성이고 휘발적이라는 점은 아쉽다고 했다.

“권력자에 의한 것이건, 사회적인 것이건 소수성을 가지고 사시는 분들에 대한 조명이 빈번해진 것은 맞아요. 사회적으로 이런 흐름은 돌이킬 수 없는 수레바퀴와 같아요. 예전엔 주로 성폭력 한 분야에 집중됐던 관심이 지금은 결이 훨씬 다양해졌고요. 관심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훨씬 좋죠. 다만 논의하는 수명이 짧다고 해야 할까요. 차별금지법이 나온지 1년도 안됐는데, 벌써 흐지부지되잖아요.”

김 변호사는 입법을 너무 조급히 하기보다 현장의 의견을 반영해달라고 요청한다. 장애인이 계단 대신 쓸 수 있는 경사로를 식당에 설치하도록 강제한 법안도 마찬가지다. 법을 개정해 경사로를 설치하면 도로점용료를 면제하도록 했는데, 행정 현장에서는 여전히 점용료를 부과했다. 점용료 대상에서 ‘부과하지 못한다’가 아닌 ‘부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재량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법이 힘이 센 건 맞는데, 현장에서 얼마나 작아질 수 있는지를 느낍니다. 항상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 물음표가 달리곤 하죠.”

김 변호사는 아이 셋을 키우는 ‘워킹맘’이다. 남편은 출퇴근 거리가 멀어 아침 일찍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는 ‘하숙생’같은 존재다. 첫째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아직 취학하지 않은 둘째와 셋째를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야 일할 시간이 생긴다.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는 시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어폰으로 통화를 한다.

그나마 국가에서 지원하는 아이 돌보미 사업 덕분에 서울을 오갈 수 있다. “힘들긴 하지만, ‘나인 투 식스’하는 직장인이 아니라 제가 힘들다고 하기는 죄송스럽죠. 저는 그래도 시간 양해를 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김 변호사는 인권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리는 걸 경계한다. 대신 좀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의식하는 삶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공익, 인권 변호사라는 게 어렵고 거창했잖아요. 시국사건을 하거나 수임료를 안받는다거나요. 아이를 키우고, 이런 직업을 가지다 보니 자기 검열이 생기는데, 그게 작동하는 삶이 인권적인 게 아닌가 싶어요. 애들에게 아빠다리라는 말을 안써요. 벙어리장갑도 손모아장갑으로 바뀌었거든요. 공부해야 하고, 그런게 억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고통스럽다 말하지 않고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지속하기 어려운 삶의 이야기라는 거죠.”

김 변호사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진 않는다. 중학생 때부터 일기를 쓰는 버릇을 들였는데, 마지막에는 ‘행복하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하루 하루 시간에 쫓기고, 벅찬 가운데서도 나 자신이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다. 남을 배려하는 노력을 하는 게 힘들기 보다 즐거운 사람이 많은 것, 그게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좌영길·안대용 기자

 

출처: 헤럴드경제(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21031200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