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개선

[인터뷰] [법조 이사람-김예원 변호사]“장애인 분리금지에도 현실은 따로성장 거창한 법보다 함께 교육받는게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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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7-16 11:39 조회2,3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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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불과 50개의 조문으로 이뤄진 이 법에는 ‘분리’라는 단어가 14번 등장한다. 그만큼 장애를 가진 사람을 비장애인과 분리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차별은 분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1954년 미 연방대법원이 ‘브라운 사건’에서 흑인과 백인 아이들을 따로 교육하는 게 위헌이라고 선언한 판결이 의미를 갖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36·사법연수원 41기) 변호사는 한쪽 시력을 잃었는데도 ‘분리’되지 않고 학창시절을 보냈다. 보는 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장애인에 대한 감수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차별당하기엔 너무 기득권이었죠. 상대적으로 공부도 잘 하는 편이었고, 힘도 셌어요. 목소리 크고 지기 싫어하고. 비평준화 지역에서 공부하다보니 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어요.” 주위에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보이지 않으니 문제의식도 없었다. 김 변호사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 건 중학생 때였다. 출산과정에서 의료과실로 인한 사고였는데, 이미 시효가 지나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억울했죠. 분명히 이런 일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요. 법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좋은 도구라고 생각해요. 변호사는 그걸 활용해서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직업이고요.”

그는 거창한 제도개선을 바라지 않는다. 좋은 제도가 있어도 현실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지금도 영유아 보육하는 과정을 보면 3,4살 짜리도 장애아동은 밥을 따로 먹어요. 왜냐면 장애아동은 밥먹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돌보는 게 힘들고요. 장애가 없는 아이들을 먼저 먹이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어렸을 때 장애인을 대하는 감수성을 잘 기르려면 이런 작은 부분에서부터 분리되는 경험을 줄여나가야 해요. 진정한 통합은 특수학교를 많이 짓는 게 아니에요. 같이 교육을 받는 게 통합이죠.” 공부하는 데 지장이 없는 신체장애아들도 휠체어를 타면 ‘중증장애’로 판정받아 일반학교를 다니기가 힘들다. 현행법상 장애인이 진학할 때 선택권이 주어지지만, 막상 교육 현장에서 이들을 외면하는 현실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가까운 곳에 학교가 있지만, 버스로 몇시간 씩 걸리는 특수학교를 찾아가야 하는 현실은 1950년대 흑인 아동들이 원거리 통학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올 여름이 되게 더웠잖아요. 열사병으로 쓰러지시는 분들 99%가 사회적 약자고, 경제적으로 소외된 분들이에요. 꼭 구조적 문제만으로 볼 건 아니에요. 얼마 전에 집에서 고독사한 분이 계셨어요. 2주에 한 번 사람이 오면서 돌보게 돼 있는데, 돌아가신 분은 막상 얼굴도 내밀지 않고, 괜찮다고 빨리 가라고 했다는 거에요. 정말 필요한 게 뭐였을까 싶어요. 몇 주에 한 번 찾아가는 시스템? 없는 거 보단 낫겠지만 그분들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끈’이 없던 거에요. 혹서기에 밖에서 폐지를 줍고 밖에 나가 일할 수 밖에 없는 분들. 밖에서 쓰러져도 사람들은 ‘술먹고 저러나 보네’ 해요. 다들 누군가의 딸이고, 아들이었을 텐데. 자라나면서 가지고 있던 끈이 옅어지는 거에요. 선선한 가을이 오면, 마음이 여유로워지면 그 끈을 좀 더 찾아보고 싶어요.” 

 

김 변호사가 속했던 사법연수원 41기는 독특한 이력을 남긴 기수다. 2011년 사법연수원생들은 ‘우리 급여를 조금 떼어 주면 공익활동을 전담하는 변호사 월급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공익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1000명의 동기들과 사법연수원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이렇게 3년 동안 '공익법률기금' 3억 6000만 원을 모았다. 후배들도 같은 취지에 동참했고, 현재도 급여의 일정액을 고정적으로 기부금을 내는 법조인들 덕에 공익활동을 전담하는 변호사들이 생겼다.

김 변호사는 연수원을 졸업하고 공익재단 ‘동천’에서 일을 시작했다. 장애인 뿐만 아니라 이주 노동자, 탈북자 등 다양한 소외계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곳이었다. 2014년에는 장애인 노동자의 의족이 파손된 것도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후 3년 간 서울시 장애인 인권센터 변호사로 일하다 지난해 장애인권법센터를 열었다. 원래 15평 전셋집을 사무실로 쓰려고 계획했지만,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무료로 '다사랑 오피스'를 제공해줘서 부담을 덜었다. 의뢰인들을위해 제공하는 법률서비스 대부분은 형사 사건에 관련된 내용이다. 장애인 근로자가 임금을 떼이고, 학대를 당하는데도 막상 피해자가 조치를 취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는 게 김 변호사의 역할이다. 올해에는 장애인 인권활동가 고(故) 곽정숙 전 의원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곽정숙 인권상’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50일 전 셋째가 태어나 아이들을 돌보기에도 무척 바쁘다. 이 날 인터뷰에도 셋째를 안고 나왔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거창한 인생목표 같은 걸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잖아요.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고, 애들도 셋이니까 건강하고 바른 시민으로 키워야겠고요. 이건 목표라기보다 숙제겠네요. 굳이 목표를 말한다면 내가 변질되지 않고 지금 하는 일 오래 하는 거에요. 많은 사람 만나면서, 오지랖도 부리고요. 사법시험 붙었으니 이걸로 할 수 있는 일 하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요.” 

좌영길 기자/jyg97@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