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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장애 차별에 분노하는 변호사, '장애 인권'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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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7-16 12:06 조회1,8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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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4275362_41478.jpg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사진 제공: 김예원)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너무 피곤한 얼굴이라서 사진은 안 찍었으면 좋겠어요. 어제 막내가 열이 나고 아파서 간호하느라 한숨도 못 잤거든요. 최대한 다양한 사진을 보내드릴게요. 독자들께 예의를 차려야죠.”

 

인터뷰 장소에 헐레벌떡 들어온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38세)는 이렇게 양해를 구했다. 이날도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오느라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끌고 온 커다란 캐리어를 보니 또 다른 출장도 예정돼 있는 듯했다. 그는 2017년 장애인권법센터를 열고, 전국을 누비며 장애인 피해자 변호를 맡으랴 세 명의 아이를 돌보랴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가 아직도 막내 모유 수유 중이거든요. 어제는 지방출장을 다녀오는 기차 안에서 유축을 하면서 의견서를 썼어요. 난방이 안 되는 수유실에서 전화상담을 하는 일도 부지기수고요. 수유도, 의견서 쓰는 것도, 전화상담도 저밖에 할 수밖에 없는 거라서 한꺼번에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어쩔 땐 극한직업 같단 생각을 해요(웃음).”

 

다소 힘든 일상을 털어놓으면서도 표정이 밝다. 시종일관 ‘자신의 이상과 성격에 꼭 맞는 일을 하고 있다’는 여유 있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지난해에는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로상,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제1회 곽정숙 인권상 등을 받아 사회적으로도 공로를 인정받았다. 올해 2월에는 장애인권을 다룬 책 ‘누구나 꽃이 피었습니다’를 펴내, 장애인권의 대중화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장애인권 변호사로서의 그의 이야기를 직접 만나서 들어보았다.

 

- “원주 귀래 사랑의집 사건을 맡으면서 동시대인으로서 원초적인 분노를 느꼈어요”

 

그는 2009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사법연수원(41기) 수료 직후 법무법인 태평양이 설립한 공익재단법인 ‘동천’에서 공익전담 변호사로 일했다. 2014년에는 서울특별시 장애인인권센터를 거쳐 현재는 ‘장애인권법센터’의 대표이자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의 궤적을 보면 ‘공익’, ‘장애인권’으로 활동을 갈무리할 수 있다.

 

공익 활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사법연수원 동기들과의 활동이 계기가 됐다. 실무사 수습을 하면서 문제제기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만나게 됐다. 김 변호사와 동기들은 이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공익법률기금 펀드’를 조성해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를 세웠다.

 

“우리 기수 중에 누군가가 공익변호사가 된다면 그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돕자는 뜻에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4기수 아래까지 활동이 이어졌어요. 이런 활동 덕분에 자연스럽게 공익 목적에 부합하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되었죠.”

 

그런데 처음부터 장애인권 분야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시각장애가 있음에도 장애인권 감수성이 적은 편이었다.

 

“제가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살았지만, 스무 살에 장애인등록을 했어요. 학교에 다닐 때는 장애인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어요.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모두 선발고사를 치러서 가는 곳이었기 때문이에요. 저와 같은 1980년대 태어난 장애인들이 거의 시설로 보내지고, 사회에서 분리됐었다는 방증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특별히 장애인권, 사실은 장애인 자체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것도 막연히 종교적인 이유로 ‘사회를 위해서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자’는 이유에서였지, ‘장애인권 옹호를 위해서 일하자’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1554441122_23274.jpg지난 2012년 ‘발달장애인의 인권침해 해결과 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 김예원 변호사가 원주 귀래 사랑의집 사건의 민·형사적 관점과 제도상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기자
 

장애인과 장애인권을 생각하게 된 것은 동천에서 일할 당시 ‘원주 귀래 사랑의집 사건’을 맡고 나서다. 이 사건은 원주시 귀래면에 있는 ‘하나님의 복지법인’이라는 미신고시설에서 장아무개 씨가 과거 30여년간 장애인 21명을 친자로 입양한 뒤 수급비를 횡령하고, 감금, 학대, 폭력 등을 일삼은 사건이다. 2012년 한 방송을 통해 장 씨를 보호자로 하는 시신 두 구가 원주시 병원 안치실에 10년 넘게 유기된 사실이 보도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났다. 당시 밝혀진 사실은 끔찍했다. 장 씨가 과거 친자로 입양한 장애인은 21명이었지만 철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곳엔 4명의 장애인만 있었으며, 그중 한 명은 세 명의 이름으로 주민등록이 되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인데 주민등록상으로는 남성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방송 이후, 과거 ‘사랑의 집’에서 살았다가 탈출했다는 사람 몇몇이 추가로 확인되었으나 21명 모두의 생사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후 장 씨는 감금, 폭행, 시체유기, 횡령,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사회복지사업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으나 고작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피해자를 대리하면서 어떻게 같은 시절을 사는 사람으로서 어떤 사람은 이런 취급을, 마치 동물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살 수 있는지 원초적인 분노가 치밀었어요. 한 사람으로 태어나 성별도 제대로 모른 채 살아가고 누군가의 도구로 이용당하는 게 너무 화가 났어요. 그들과 함께 분노하고 싸우면서 제가 갈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다른 이유는 이 과정에서 만난 장애운동 활동가들이 장애인권을 위해 발 벗고 뛰는 모습에서 그들과 함께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답니다.”

 

- “장애인권 사건을 더 깊고, 넓고, 자유롭게 맡고 싶었죠”

 

변호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동천에서 그는 난민, 이주민, 장애인 등의 변호를 맡았다. 그러다 서울특별시 장애인인권센터에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장애인권 관련 사건을 전담하게 됐다. 그러다가 2017년 장애인권법센터를 차리고 대표이자 변호사로 활동하게 됐다.

 

“일부 언론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는 걸 주위에서 만류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 아무도 말리지 않았어요. 그냥 그럴 거라고 추측한 것 같아요. 세상에 연예인이랑 전문직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하잖아요(웃음)? 제가 대단한 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남편도 일하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그저 30대에 들어서면서 이제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고 안전한 길보다는 의미 있는 길을 걷자는 의미로 장애인권법센터를 세우게 된 거예요.”

 

더욱 절실했던 것은 장애인권 침해 사례가 있을 때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는 서울시 사건만 맡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서울에서는 공익 변호를 맡을 곳이 제법 많아요. 저는 지방에서 일어나는 장애인권 침해 사건도 맡고 싶었어요.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의 경우 세금으로 운영되다 보니 치우침 없이 중립을 지켜야 하는 부분도 있었고요. 신고를 받고 운영되는 곳이니까 신고가 없다면 관여할 수 없는 제약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기동성이 다소 떨어질 수 있죠. 신고하는 분들은 그나마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데, 신고할 곳을 모르거나 방법조차 모르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이분들은 장애인단체에서 개입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분들의 변호도 맡고 싶었어요. 장애인 피해자들이 조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자고 결심했던 거죠.”

 

그는 지금까지 1000여 건의 상담을 맡았다. 사건 변호를 모두 맡을 수는 없기에 어떤 곳에서 어떤 상담을 받아야 할지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상담을 하거나 사건을 맡으면서 그들이 당한 처참한 사건으로 마음이 힘들지 않았을까?


“장애인 피해자가 너무 큰 피해를 당했는데,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조금 힘들지만, 기본적으로는 힘들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일로 피해자들의 인생이 무너졌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지금 현재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도 함께 싸우면서 앞으로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하면 되고, 이런 경험이 피해자들이 훗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그 사람 편에서 늘 함께 싸우는 동반자가 되어줄 준비가 돼 있으니 그 사건 자체로 힘들거나 답답하지 않아요.”

 

1554441162_43818.jpg올해 1월 교남학교에서 장애학생에서 폭력을 가한 교사를 불기소한 검찰에 사과와 재발방지 요구를 하는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예원 변호사. 사진 최한별 기자
 

그가 가장 힘든 것은 가해자를 동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다. 장애인시설에서 가해지는 폭력이나 비인권적 행위에 대해서 처음에는 분노하고 금방 잊고 사그라드는 정서도 못마땅하다.

 

“발달장애 아이의 엄마가 자기 자식을 죽인 사건이 있었어요. 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 본인은 약을 먹고 자살기도를 했는데 죽지 않았어요. 그런데 재판장의 분위기는 ‘어머니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냐, 불쌍하다, 얼마나 힘들었겠냐’라는 분위기였어요. 교남학교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사회복무요원들이 날려 차기로 장애학생 배를 차서 넘어뜨리고, 여덟 명이 동시에 한 아이를 쥐어뜯는 게 CCTV에 다 찍혔는데, 불기소가 돼요. 불기소 이유에 ‘장애학생을 물리적으로 제지하는 게 불가피하다’라는 내용이 나와요. 단순히 장애학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손을 잡거나 팔로 제지하는 행위가 아닌 데도 말이죠. 장애인이 피해자인 경우 대체로 이 상황에서 이런 행위가 위법한지 적법한지 얼마나 불법성이 큰지에 대해서 따지지 않아요. 그런데 피해자가 장애학생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이 아동학대가 되고, 폭력이 되지 않나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너무 당당해요. 형량도 약하게 나오는 편이고요.”

 

- “‘누구나 꽃이 피었습니다’ 이 말만 가슴에 새기면 좋겠어요”

 

장애인 피해자들의 사건을 맡다 보니 사법부는 물론 사회적으로 만연한 장애인권 의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김 변호사는 말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애인권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너무 고르지 못해요. 한편으로는 되게 위험한 사람이 되고, 한편으로는 되게 불쌍한 사람이 돼요. 또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기도 해요. 그러다가 자신의 일로 닥치면 그때서야 알게 되고 울분이 쌓이게 되는 거죠. 이건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장애인권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혹은 장애인권 옹호활동가들이 함께 읽고 고민할 수 있는 책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출판사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생각하고 있어서 책을 내게 된 거예요. 지금껏 경험한 것들, 맡았던 사건의 면면과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이 겹쳐지는 지점을 소개하며 장애인권에 대해 조금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내용을 담았죠.”

 

그가 책에서 가장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제목에 잘 드러나 있다.

 

“책 제목을 지을 때 가장 고심했어요. ‘장애’라는 말과 ‘인권’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의미를 함축할 수 있는 제목을 고민했어요. 결국 편집자가 지었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요. 제가 박노해 시인의 ‘꽃은 달려가지 않는다’라는 시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시에서 ‘자신이 타고난 그 빛깔과 향기로 / 꽃은 서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고 / 자기만의 최선을 다해 피어난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장애인권도 그렇거든요. 우리는 각자 꽃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모습과 삶의 형태가 있어요. 서로 그것만 인정한다면 장애인권, 서로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 책에서 제목만이라도 전달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어요.”

 

1554357419_11763.jpg책 『누구나 꽃이 피었습니다』 표지, 김예원 글, 버닝피치 그림 ⓒ도서출판 이후
 

- “저를 믿고 상처를 공유하는 분들을 위한 조력자로 남을 거예요”

 

언론에서 그는 조금 특별한 변호사로 소개되곤 한다. ‘아이를 안고 법정에 서는 변호사’, ‘의안을 꺼내어 법정에 선 변호사’, ‘시각장애를 극복한 변호사’ 등등 수식어도 많다. 그는 그런 수식이 다소 당황스럽다고 했다.

 

“사실 의도한 게 아니거든요. 50일도 안 된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안고 간 거였는데 언론사 기자가 있을 줄 몰랐어요. 의안은 아동학대로 한쪽 눈을 잃은 아이에 대해서 재판부가 ‘한쪽 눈을 잃었다’는 1차원적인 피해만 인식하기에 심리적, 정서적, 치료적 비용을 설명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꺼냈던 거예요. 의안은 제 가족에게도 잘 보여주지 않아요. 시각장애인 변호사는 사실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발 ‘극복했다’라는 수식은 안 붙였으면 좋겠어요. 사회적 지위를 어느 정도 얻은 장애인에게 붙이는 기계적 수식이고, 이 사회에 장애인 인식을 나타내는 단면이라고 생각하지만, 속된 말로 굉장히 구린 표현이잖아요(웃음).”

 

그의 특별함 덕분인지 광고계, 정치권에서도 영입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장애인권 변호사로, 어머니로 현재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저는 아이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는 것도 너무 행복하고요. 지금 하고 있는 장애인권 옹호 활동도 제 성격과 이상에 잘 맞아요.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을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제게 아프고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애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욕하고, 곁에서 함께 싸우는 조력자가 되고 싶어요. 묵묵하지 않은 조금은 소란스러운 조력자, 그렇게 힘이 없지는 않은 조력자요.”

 

그는 독자들에게 불의를 보면 참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

 

“어떤 부당한 일을 겪거나 목격했을 때 참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어요.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의 전환 계기가 될 수 있어요.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주위에 저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면 해요. 그래야 세상이 조금씩 변할 수 있어요. 제가 인터뷰를 하는 이유도 부당함에 맞서려는 분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단서라도 남기기 위해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