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선거 전에 꼭 바꿔봅시다읽음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성인 대다수는 첫 투표의 기억이 있다. 설렜을 수도, 귀찮았을 수도 있는 그 처음 투표의 경험은 ‘나도 이 사회에 중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주권의식으로 자연스레 연결되기도 한다.

투표 방식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의 정도 역시 천차만별이다. 21세기가 된 지 언제인데 아직도 전자투표가 아닌 종이투표를 고집해야 하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거의 공정성과 중요성을 감안할 때 그 정도 고생은 시민이라면 당연히 감내할 만한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떠들썩한 재·보궐 선거가 치러지는 동안 한 중증 지체장애인 A씨에게 연락이 왔다. 특수휠체어에 누워서만 생활하며 활동지원사의 지원 없이는 혼자 이동하기도 어려운 A씨는, 코로나19 상황 이후 더욱 외출을 자제했다. 집에만 있으니 몸이 더 약해져서 도저히 투표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투표는 집에서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어 우편으로 보내는 거소투표 방법으로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이번 선거에 거소투표로 참여하려면 3월16일부터 20일까지 단 5일 안에 미리 신고를 해야 했다. 신고 대상자는 재·보선 실시지역에 주민등록이 된 사람 중 중대한 신체장애로 거동할 수 없는 사람, 선거구 외에 거주하는 사람뿐 아니라 코로나19 확진자, 일부 자가격리자도 포함되었다.

인터넷으로 신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거소투표 신고서를 작성해 관공서에 직접 제출하거나 우편으로 도착시켜야 했다. A씨는 혼자서 우편 발송이 불가능했기에 도와줄 사람을 찾는 데 오래 걸렸다. 18일에 겨우 발송했고, 20일이 토요일이라 그랬는지 결국 기간 내에 신고서가 도착하지 못했다. 사정을 설명하며 투표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보았지만 거절당했다. 이번 투표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투표가 생각보다 만만찮은 것은 중증 지체장애인만 경험하는 일이 아니다. 투표에 참여해 본 발달장애인들은 입을 모아 ‘어렵다’고 말한다. 글자를 잘 모르는 사람도 어렵지 않은 투표를 위해 ‘쉬운 선거 공보물’과 ‘그림투표용지’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몇 년째 주장으로만 되풀이될 뿐이다. 이미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얼굴 사진이나 정당의 로고를 함께 인쇄한 투표용지가 여러 나라에서 쓰이고 있음에도 말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형 투표 안내문과 점자투표 보조용구, 손 사용이 제한되는 지체장애인을 위한 기표용구가 도입되기까지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도입은 되었지만 내용은 아직도 부실하다. 점자형 선거공보물은 활자형 선거공보물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의 정보만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는 16면 이내,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12면 이내로 제작이 제한된다. 한 면에 담을 수 있는 점자의 양이 활자보다 훨씬 적음을 감안하면 지금의 점자형 선거공보물은 주권자의 정보접근권을 오히려 제한하는 형국이다.

심지어 퇴보하는 정책도 있다. 선거관리위원회 지침상 ‘장애(시각, 지적·자폐성 등 신체)로 혼자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보조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에서 ‘발달장애’가 스리슬쩍 빠졌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달장애인이 투표 보조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한 선거관리위원회의 지침이 장애인 차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지만 현장에 얼마나 변화를 가져올지는 미지수이다.

민주주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나누지 않는다. 누구나 이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면 평등한 주권자이다. 투표라는 행위는 그 주권을 실현하는 도구 역할을 할 뿐인데, 이 도구로 인한 주권 행사의 제약은 아직도 이처럼 많다. ‘장애’라는 글자를 떼어내고 상상해 보자. 모두를 위해 더 나은 투표는 무엇일까. 글씨만 빽빽한 투표용지, 도장을 찍을 칸이 너무 좁은 투표용지보다 더 나은 제도와 방식을 속히 도입해야 한다. 사회적 소수자에게 편한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국 모두를 편하게 하는 진보가 되므로 더 망설일 이유도 없다.


경향티비 배너
Today`s HOT
젖소 복장으로 시위하는 동물보호단체 회원 독일 고속도로에서 전복된 버스 아르헨티나 성모 기리는 종교 행렬 크로아티아에 전시된 초대형 부활절 달걀
훈련 지시하는 황선홍 임시 감독 불덩이 터지는 가자지구 라파
라마단 성월에 죽 나눠주는 봉사자들 코코넛 따는 원숭이 노동 착취 반대 시위
선박 충돌로 무너진 미국 볼티모어 다리 이스라엘 인질 석방 촉구하는 사람들 이강인·손흥민 합작골로 태국 3-0 완승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 애도하는 시민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