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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휴지 조각되는 검찰 조서…공백을 피해자 고통으로 메우지 않으려면

2022년이 시작됐습니다. 여러 변화가 있겠지만, 형사사법의 가장 큰 변화로 꼽히는 건 '검찰 조서 증거능력 제한'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피고인의 "동의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면 검찰 수사 당시 피고인이 진술했던 내용을 판사가 볼 수 없게 됩니다. 피의자 진술조서가 수십 장이든, 수백 장이든 휴지 조각이 된단 겁니다.

왜 이렇게 개정했을까요?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입니다. '조서를 꾸민다.'라는 말이 있죠. 이미 '유죄'라고 생각하는 검사나 수사관이 적는 조서엔 의도가 반영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심하게는 강압에 의한 자백이 있을 수도 있죠. 유죄냐, 무죄냐에 대한 판단은 법정에서의 심리로만 해야 한다는 '공판중심주의'로 한 발 더 다가가기 위한 변화가 '검찰 조서 증거능력 제한'인 겁니다.
 

피해자 증언 중요성 커져…"피해자가 법정 나와 피해 입증"


좋은 '방향'이라는 데에는 다수가 공감하는 듯하지만, 우려가 나옵니다. 피의자 진술 조서의 공백만큼 피해자에게 부담이 갈 수 있단 겁니다. 검찰은 피고인이 부인하면, 다른 증거로 범죄를 입증해야 합니다. 그중 피해자의 증언은 비교적 손쉬운 증겁니다. 성범죄같이 물적 증거를 찾기 어려운 범죄의 경우 피해자 법정 증언 중요성이 커지게 되는 겁니다.

미성년자, 지적 장애인 피해 사건을 다수 맡아 온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SBS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예원 변호사
 
"피의자 신문 조서가 있으면 어떤 것이 이 사건의 쟁점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피해자를 부른다고 할지라도 그 쟁점에 맞는 질문만 할 수 있는데, 아예 피의자 신문 조서 자체가 없으면은 처음부터 이 범죄가 어떻게 성립했고 어떻게 피해 입었는지에 대해서 모두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서 입증 책임을 져야 하는 큰 부담을 갖게 됩니다."

-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 자신의 피해를 소상히 밝혀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제게 성범죄 피해를 제보해주셨던 분과 함께 재판에 방청을 간 적 있습니다. 피고인이나 다른 증인들이 아닌, 피해자 바로 옆에서 피해자 모습을 집중해서 보게 된 거죠. 이미 사건이 일어난 지는 1년 이상 지났고, 피해자 증인신문이 있는 날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오랜 시간 진행된 재판 내내 앞자리 의자를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다 아무 말 없이 법정을 나갔습니다.

이렇게, 성인 피해자가 재판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적 부담이 엄청난데, 미성년자나 지적장애인의 경우 더 심하겠죠. 특히 가해자 측에서 무리한 반대 신문을 진행할 경우 심적 부담은 진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만들고, 피해자의 진술이 흔들린다는 건 재판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미성년자 혹은 지적장애인의 경우에는 범행 직후에 얘기했던 그 피해 사실의 소상함을 법정에서 그만큼 수준으로 절대 진술하기가 어려워요. 기억은 왜곡되거나 쇠퇴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그 최초의 자기가 진술했던 내용과 거의 유사한 수준으로 이 피해를 복기해내지 않으면 마치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오해받는 경우가 있거든요."

-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 영상 녹화물 진술도 못쓰게 돼

우려에 우려가 더해졌습니다. 최근까진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에 한해서, 조사한 영상 녹화물을 예외로 증거물로 인정해줬는데, 지난달 23일 헌재는 관련 법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피고인의 반대신문 기회를 제한해 방어권을 침해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아무리 어린 피해자라 하더라도,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법정에 나와 자신의 피해를 직접 말하게 된 겁니다. 한 변호사는 성폭력 피해 지원 기관인 해바라기센터에서 미성년 피해자 진술 과정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하는 거야. 이렇게 기본적인 설명에만 30분이 걸립니다. 30분 만해도 아이 진이 다 빠져요. 의미 있는 진술이 나올 때까지 최소 4~5시간은 걸리는데, 그걸 재판에서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하면 온전히 기다려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경찰, 검찰, 법원 등 형사절차 관여하는 모두가 변해야"

피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두 가지 변화가 고스란히 피해자 부담으로 전가되지 않으려면 형사 절차에 참여하는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승재현 한국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수사 중 피의자 진술을 들은) 조사자 증언 제도를 쓴다는 말로는 너무나 가벼운 말이고 그 조사자 증언 제도를 통해서 어떻게 피신 조서를 대신할 만큼의 진술의 신빙성을 법원에 설득시킬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조사자 증언 검찰과 경찰이 수사 단계부터 유기적 협조가 안 되면 조사자 증언 제도는 못 씁니다. 검찰은 경찰을 지휘하듯 조사자 증언을 활용해선 안 될 것이고요. 경찰은 조사자 증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머릿속에 명심하고 수사를 할 때 굉장히 치밀하게 수사의 일지를 작성해 놓아야 될 겁니다."

- 승재현 한국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또 승재현 연구위원은 당장 가해질 수 있는 미성년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막기 위해서 법원도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진술 조력인이 반드시 피고인 측 진술을 받아서 아이에게 아이 언어로 묻도록 해야 합니다. 친족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의 친족이 진술조력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하고요. 재판장이 소송지휘권을 통해 2차 가해 적절히 제지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 승재현 한국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사법정책연구원이 펴낸 『수사기관 작성 조서의 증거 사용에 관한 연구: 2020년 개정 형사소송법에 따른 실무 변화 모색』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어떠한 제도를 '도입'하는 것과 실제 형사절차에서 해당 제도의 도입 취지를 제대로 '실현'해가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였고,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대폭 제한한 2020년 개정 형사소송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입 취지대로 제도가 작동할 수 있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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