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자기결정권’ 핑계는 이제 그만읽음

김예원 |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판자촌 동네에 살던 지적장애 여성이 있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동네 작은 공원에 나가서 사람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공원에서 그녀보다 50살 정도 많은 한 남성이 접근해왔다. 그는 이 여성에게 심한 지적장애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먹을 것과 선물을 사주며 환심을 얻는 데 성공한 그는 급기야 이 여성의 성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사건은 수사기관에 입건되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과 이야기하는 중에 나타났다. “둘이 사귄 것 같은데, 맞다면 고소를 취하하라고 피해자를 설득해 주세요.”

당황스러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으니, 헤어지고 둘이 나눴다는 안부 인사가 담긴 문자메시지를 내밀며, “이것 보세요, 여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잊을 만하면 들먹여지는 “성적 자기결정권”. 이 단어를 들으니 불현듯 어떤 피고인이 생각난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피고인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아동의 성을 사면서, 쪽지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받고 그 과정을 녹음까지 했다. 기소되자 법정에 그 쪽지와 녹음파일을 내며 당당하게 “쟤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건데요?”라고 주장하던 그 피고인.

피고인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핑계를 대는 일은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다. 대다수의 장애인, 아동 성범죄 피해자가 겪는 장면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언제부터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괴상한 논리로 악용되기 시작했을까?

원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은 성교육 과정 중 피해자의 인지능력과 자존감 향상에 목적을 두고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용어를 성범죄 ‘보호법익’으로 가져온 것이다. 용어의 태생과 적용이 어긋났다. 게다가 현행법은 이 보호법익을 더 좁히고 있다. 성범죄는 폭행이나 협박, 위계, 위력을 통해 피해자의 의사가 제압되어야 성립한다.

피해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거절했는지에 판단의 초점이 맞춰지기에, 피해자가 “성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표시한 것을 입증 못하면, 그 성관계는 정당화된다. 이로써 장애인, 아동·청소년과 같이 의사결정에 취약한 피해자는 오히려 ‘꽃뱀’ 취급을 받거나, 과도하게 ‘보호’의 대상으로만 머무는 것이다.

성범죄의 보호법익을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축소하는 부조리를 벗어나야 한다. 성범죄는 인격의 기반이 되는 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므로, 일개 ‘선택 여부’만으로 범죄 성립을 따질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피해자의 연령과 발달 수준을 기초로 온전한 성 발달에 어떤 영향 또는 해악을 미치는가를 기준으로 성범죄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

다행히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몇 개의 형법 일부개정안에 ‘비동의간음죄’가 담겼다. ‘동의’라는 요건이 모호하고 불명확해서,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는 접어두자. 개정안의 취지는 단지 ‘동의’ 여부로 성범죄를 판단하자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개인의 고유한 성과 인격을 침해했는지를 더 현장 상황에 맞게 다각도로 살펴보자는 뜻으로 이 시대의 마땅한 걸음이다.

엊그제 대법원도 한 걸음 내디뎠다. 아동·청소년이 성관계에 동의했거나, 동의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성관계로 이어지는 과정에 속임이 있었다면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전원합의체 판례가 그것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권리’다. 진짜 권리는 권리의 주체가 자신을 위해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권리를 침해한 자의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전락한 ‘성적 자기결정권’은 이제 폐기해야 한다. 모든 사람의 인격은 존엄하며, 성은 그 인격의 근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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