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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다음 선거 전에 꼭 바꿔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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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3-14 11:49 조회4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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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대다수는 첫 투표의 기억이 있다. 설렜을 수도, 귀찮았을 수도 있는 그 처음 투표의 경험은 ‘나도 이 사회에 중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주권의식으로 자연스레 연결되기도 한다.

투표 방식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의 정도 역시 천차만별이다. 21세기가 된 지 언제인데 아직도 전자투표가 아닌 종이투표를 고집해야 하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거의 공정성과 중요성을 감안할 때 그 정도 고생은 시민이라면 당연히 감내할 만한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떠들썩한 재·보궐 선거가 치러지는 동안 한 중증 지체장애인 A씨에게 연락이 왔다. 특수휠체어에 누워서만 생활하며 활동지원사의 지원 없이는 혼자 이동하기도 어려운 A씨는, 코로나19 상황 이후 더욱 외출을 자제했다. 집에만 있으니 몸이 더 약해져서 도저히 투표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투표는 집에서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어 우편으로 보내는 거소투표 방법으로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이번 선거에 거소투표로 참여하려면 3월16일부터 20일까지 단 5일 안에 미리 신고를 해야 했다. 신고 대상자는 재·보선 실시지역에 주민등록이 된 사람 중 중대한 신체장애로 거동할 수 없는 사람, 선거구 외에 거주하는 사람뿐 아니라 코로나19 확진자, 일부 자가격리자도 포함되었다. 

인터넷으로 신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거소투표 신고서를 작성해 관공서에 직접 제출하거나 우편으로 도착시켜야 했다. A씨는 혼자서 우편 발송이 불가능했기에 도와줄 사람을 찾는 데 오래 걸렸다. 18일에 겨우 발송했고, 20일이 토요일이라 그랬는지 결국 기간 내에 신고서가 도착하지 못했다. 사정을 설명하며 투표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보았지만 거절당했다. 이번 투표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투표가 생각보다 만만찮은 것은 중증 지체장애인만 경험하는 일이 아니다. 투표에 참여해 본 발달장애인들은 입을 모아 ‘어렵다’고 말한다. 글자를 잘 모르는 사람도 어렵지 않은 투표를 위해 ‘쉬운 선거 공보물’과 ‘그림투표용지’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몇 년째 주장으로만 되풀이될 뿐이다. 이미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얼굴 사진이나 정당의 로고를 함께 인쇄한 투표용지가 여러 나라에서 쓰이고 있음에도 말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형 투표 안내문과 점자투표 보조용구, 손 사용이 제한되는 지체장애인을 위한 기표용구가 도입되기까지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도입은 되었지만 내용은 아직도 부실하다. 점자형 선거공보물은 활자형 선거공보물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의 정보만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는 16면 이내,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12면 이내로 제작이 제한된다. 한 면에 담을 수 있는 점자의 양이 활자보다 훨씬 적음을 감안하면 지금의 점자형 선거공보물은 주권자의 정보접근권을 오히려 제한하는 형국이다. 

심지어 퇴보하는 정책도 있다. 선거관리위원회 지침상 ‘장애(시각, 지적·자폐성 등 신체)로 혼자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보조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에서 ‘발달장애’가 스리슬쩍 빠졌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달장애인이 투표 보조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한 선거관리위원회의 지침이 장애인 차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지만 현장에 얼마나 변화를 가져올지는 미지수이다. 

민주주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나누지 않는다. 누구나 이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면 평등한 주권자이다. 투표라는 행위는 그 주권을 실현하는 도구 역할을 할 뿐인데, 이 도구로 인한 주권 행사의 제약은 아직도 이처럼 많다. ‘장애’라는 글자를 떼어내고 상상해 보자. 모두를 위해 더 나은 투표는 무엇일까. 글씨만 빽빽한 투표용지, 도장을 찍을 칸이 너무 좁은 투표용지보다 더 나은 제도와 방식을 속히 도입해야 한다. 사회적 소수자에게 편한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국 모두를 편하게 하는 진보가 되므로 더 망설일 이유도 없다.

 

출처: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412030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