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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이 필요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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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1-15 13:16 조회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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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012210300005

 

 

며칠 사이 두 사건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는 A씨를 위해 인권 침해 진정을 넣었고, 성폭력을 가한 피의자들이 혐의 없다는 결정을 받아든 피해자 B씨를 위해 그 불기소 결정에 대한 항고를 했다. 사건의 당사자인 두 사람은 서로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내게 그 둘은 비슷했다. 

A씨는 벌써 10년 가까이 정신병원에서 살고 있다. 병원을 나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방법을 찾기 어렵다. 법이 바뀌어 정신병원에서 퇴원이 쉬워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남에게만 해당되는 일 같았다. A씨가 병원에 있는 근거는 항상 서류상으로 ‘적법’했기 때문이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A씨의 병원에서는 이유 없이 환자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가족이 없는 다른 환자들은 본인도 모르게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돼 있었다. 그런데 정작 수급자인 당사자는 수급비를 구경해본 적이 없다. 병원에서 모든 통장을 관리하고 있어서다. 달달한 간식이 먹고 싶어서 수급비에서 조금만 용돈을 달라고 병원에 말해 보았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담배를 좋아하는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밥에서 개미가 이틀 연속 나온 날, 항의를 해보았지만 유난스럽게 군다고 질책을 당해야 했다. A씨는 병원이라는 이름의 견고한 시설에 살고 있다. 

B씨는 시골에서 가족과 살고 있는 지적장애 여성이다. 장애가 중한 편이라 일상생활이 어려웠지만, 천성이 밝아 사람을 참 좋아하고 잘 웃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B씨는 혼자 끙끙 고민하는 일이 생겼다. 마을의 버스나 택시를 운전하는 아저씨들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모두 B씨의 지적장애를 잘 알고 있었다. 차를 마시자, 영화를 보자,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며 B씨를 불러낸 그들은 모두 B씨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유부남들이었다. 

사건을 지원하며 더 절망했던 건 B씨가 속한 ‘가정’이라는 이름의 시설이었다. 몇 개월간 성착취를 당한 이 여성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그의 가족이었다. B씨는 지적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모든 선택과 결정을 통제받아왔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도 말을 걸기 위해서는 가족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누군가와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일은 사치였다. 가족에게 B씨는 애물단지이자 짐이었기에 그 정도의 잔소리와 간섭은 B씨가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B씨가 겪었던 일을 가족들이 알게 된 날, 그들은 ‘온전치 못한 네가 밖으로 나돌아 다녀서 일어난 일’이라 했다. B씨는 허울만 가정인, 어떤 시설에 살고 있다.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하지 않고, 지역사회에 거주하게 하면서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탈시설화(deinstitutionalization)는 장애인 거주시설의 문제만은 아니다. 굳이 시설이라는 공간에 수용되어 살지 않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통제되는 삶은 사람의 생기를 몽땅 흡수해버린다. 가정 안에 있더라도, 병원에 적법하게 입원되어 있더라도 이미 시설화된 삶을 견뎌야 하는 사람은 아직도 지나치게 흔하다.

지난 12월10일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다.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권리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글씨로만 박혀 있는 이상적 담론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실현돼야 하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안이 갈 길은 아직도 구만리인 것 같다. ‘장애인은 위험하니 가둬야 한다’는 혐오와 배제가 남아 있고, ‘대형 시설을 소규모 시설로 줄이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교묘한 훼방도 들린다. 사실 이 법에 의해서도 A씨와 B씨의 탈시설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이 속히 통과되길 고대한다. 그래서 시설화된 병원이나 가정에서 목소리를 빼앗기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도 큰 울림이 전해지길 바란다. 누구나 한 번뿐인 인생에서 나를 찾아 진짜 내 모습으로 살 기회는 공평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