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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글로리’ 되찾기 어려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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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1-16 04:03 조회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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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3130300095

 

 

학교폭력 피해자 ‘문동은’의 치열한 복수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현실에 미치는 여파도 대단하다. 국가수사본부장이 임명 하루 만에 아들의 학교폭력 전력으로 낙마하기도 하고, 학창시절 내내 학교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며 직접 가해자들을 찾아가 왜 그랬는지 따져 묻는 여정이 한 방송에 담겨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드라마 <더 글로리>의 작가는 피해자가 잃은 존엄이나 명예, 영광과 같은 것들을 되찾는 원점으로 가해자들의 사과를 생각하며 제목을 지었다고 한다. 

가해자는 자발적으로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야 사과할지 고민한다. 형사사법체계는 그 고민의 중요한 계기로 작동한다. 고소당하고 수사받고 재판에 넘겨져 판결 선고를 기다리며 가해자는 그제야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곤 한다. 

안타깝게도 지난 몇 년간 형사사법체계에서 피해자의 설 자리는 급격히 좁아졌다. 사건 시작부터 난관이다. 원래 피해자는 경찰과 검찰 어디에라도 자신이 당한 범죄를 알릴 수 있었다. 그런데 2021년부터 시행된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에 알릴 범죄와 경찰에 알릴 범죄가 복잡하게 쪼개지더니 대부분의 사건을 검찰에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큰 용기를 내서 고소장을 써 가도 검찰은 경찰로 가라하고, 경찰은 이런저런 이유로 고소장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겨우 사건을 접수시켰다고 하더라도 산 넘어 산이다.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이 수사종결권을 가지게 되면서, 확실한 증거가 있는 사건은 검찰에 송치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건은 경찰이 종결할 수 있게 바뀌었다. 증거가 별로 없거나, 법리적으로 복잡한 사건들은 혐의 없음으로 불송치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불송치가 불만인 피해자는 경찰서장에게 ‘이의신청서’를 제출해야만 겨우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수 있다(‘이의송치’). 수사권 조정 전에는 모든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어 피해자는 저절로 두 번째 기회를 얻었지만, 이제는 애써 이의를 제기하는 소수의 피해자만 검찰에 사건을 보낼 수 있다. 

여기에 작년 봄 휘몰아친 검수완박 입법으로, 이의송치된 사건에 대한 검찰 보완수사도 제 기능을 잃게 되었다. 민주당이 이의송치 사건에 대한 검찰의 보완수사를 ‘동일성’ 안에서만 하라고 법을 바꿨기 때문이다. 불송치 결정에 대한 ‘고발인’의 이의신청권도 별다른 이유 없이 이때 삭제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사건이 송치되어도 피해자의 눈물은 이어진다. 수사권 조정 때 검찰 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이 없어진 것에 더하여 검찰의 수사지휘권까지 없어지면서, 경찰과 검찰 누구도 사건을 책임지지 않는 합법적 ‘핑퐁’ 지옥이 시작되었다. 

검찰은 ‘보완수사요구’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사건 관리 목록에서 사건을 날릴 수 있게 된 반면, 경찰로 몰린 수사업무의 과부하로 보완수사요구는 산처럼 쌓여간다. 오죽하면 최근 법무부 검경협의체의 수사준칙 개정과정에서 경찰이 ‘송치 사건은 검찰 직접 보완수사를 원칙으로 하라’며 검경 수사권 조정 때의 자신의 주장을 뒤집기까지 했을까.

설상가상 최근 대법원은 입법으로 풀어야 할 압수수색 절차 변화를 스리슬쩍 형사소송규칙 개정을 통해 도입하려 하고 있다. 속도가 생명인 전자정보 압수수색에서 범죄 관련자들을 친절하게 법원에 불러 무슨 이유로 압수하려 하는지 알려주고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이다. 범죄자들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70년 넘게 이어온 형사사법체계를 불과 3년 만에 뒤죽박죽 바꾸면서 피해자가 형사사법제도를 통해 영광을 찾을 기회는 점점 요원해지기만 한다. 피해자의 빼앗긴 존엄성을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법과 제도가 겹겹이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