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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보호출산제로 태어나는 아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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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1-16 04:20 조회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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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9242020015

 

세상에 와 줘서 고맙구나. 배 속에서 세상은 어떤 곳일까 설레며 열심히 자라났을 네가 대견하고 고마워. 힘들게 세상에 왔는데 왜 너를 반겨주는 엄마와 아빠가 없는지 의아하고 불안할 수 있겠지. 지금부터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차분히 설명해주려고 해. 마음이 아픈 이야기지만 한 번은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라서. 

너도 알겠지만 모든 아이는 부모가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고, 친생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날 권리가 있어. 부득이하게 부모와 떨어져 지내게 되더라도 지속적으로 연락할 권리도 있단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에서 이 권리들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의 뿌리를 안다는 것이 한 사람의 전체 인생을 지탱하는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야. 네가 태어난 이 대한민국은 30년 전에 이미 아동권리협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네게 이런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태어나기 몇년 전부터 사람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도 낳지 않는 문제로 나라 전체가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단다. 후손을 낳으려는 생명의 본능을 거스를 만큼 삶이 팍팍해진 것이지.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분위기에서 빈부격차가 심해지는데, 독박육아와 경력단절 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아기는 점점 더 줄었어. 종종 아기를 낳자마자 죽이거나 버리는 끔찍한 일이 생기기도 했단다. 

이 문제를 비교적 손쉽게 해결하기 위해 국회는 보호출산제라는 이름의 익명출산 특별법을 만들었어. 아기를 키울 자신이 없거나 스스로 기를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국 어느 병원에서나 익명으로 아기를 낳은 후 두고 떠날 수 있게 하는 법이야. 심지어 자신이 낳은 아기를 키우다가 한 달 안에 합법적으로 양육을 포기할 수도 있단다. 아기가 택배 물건도 아닌데 한 달 안에 국가에 무료 반품할 수 있게 되면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동들이 줄줄이 반품될 처지가 되었어. 불법 영아 유기를 막기 위해서 만든 법이라면서 실은 더 폭넓게 영아 유기를 조장하는 모순이 생겨버린 것이지. 

아동의 입장에서 몹시 잔인한 법이니 입법을 하지 말아달라는 반대가 물론 있었어. 그래서 보호출산을 하려는 여성을 상담해서 직접 키우도록 마음을 돌려보겠다는 내용이 법에 적혀 있기는 해. 하지만 그 중요한 일을 할 전문 인력도, 전문 기관도 없이 법부터 뚝딱 나왔기에, 처우가 열악한 상담 현장에서 아동 유기 전 형식적 상담에 그치더라도 이를 막기 어렵다는 우려가 크단다.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가정 대신 살게 될 확률이 높은 곳은 보육원이라는 아동양육시설이야. 아이들이 가정이 아닌 시설에서 집단적으로 자랄 경우 아동 발달에 해악이 크다는 여러 연구를 근거로 보육원이 아예 없는 나라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거꾸로 보호출산제로 인해 보육원이 더욱 붐비게 되었어. 

이 법을 만든 사람들은 익명출산으로 태어난 아기들이 입양을 통해 새로운 가정을 찾으면 된다고 하더라. 하지만 입양가정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큰 데다가 친자식조차 출산하지 않으려는 이 나라에서 까다로운 입양 절차와 긴 기다림을 뚫고 과연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새 부모를 만날 수 있을까.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 속사정도 모르면서 무작정 2등 시민 취급하는 무례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너라는 존재가 얼마나 존엄하고 소중한 생명인지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친부모를 알 권리를 사실상 박탈당한 것이나 제대로 된 위기 임신 지원이 없어서 네가 집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살 수 있었던 기회를 잃었던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나를 찾아오렴. 너의 편이 되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내고 함께 싸워줄게. 

네 삶의 매 순간에 크고 작은 웃음이 채워지길, 아프지 않고, 학대받지 않고, 시기에 맞는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리길 매일 두 손을 모을게.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