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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개선] 6살 성폭력 피해아동이 법정에 서야 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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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1-03 00:43 조회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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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856 

 

 

 

아이는 8살이었다. 등굣길에 낯선 남성을 만나 성폭행을 당했다. 장기의 80%가 훼손됐다. 아이는 배변 주머니를 차고 상처가 아물지 않아 제대로 앉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몇 시간에 걸쳐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반복 진술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가해자와 한 법정에 출석해야 했다. 피고인 측 변호인의 반대신문에 답하며 피해 사실을 입증했다. 가해자의 이름은 조두순이다.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영상녹화 진술 제도’가 주목받았다. 사건 초기에 피해자의 진술을 영상으로 녹화한 후, 이 영상물을 법원에 증거로 제출할 수 있는 제도다. 영상녹화 진술 제도는 2003년에 도입되었지만 2008년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2010년 즈음부터 실무 현장에서 활발히 이용되기 시작했다.

2011년, 8세와 9세 아동을 성추행하여 집행유예를 받은 한 성범죄 피고인이 해당 법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2년 후인 2013년, 헌법재판소(헌재)는 이 제도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아동보호라는 공익적 가치에 무게를 실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2022년, 이 제도는 사라졌다. 지난해 12월23일 헌재가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처벌법 조항을 위헌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왜일까? 여기에도 성범죄 피해 아동의 이야기가 관련돼 있다. 그 아이도 8살이었다.

2010년, 대구에 살던 아동 ㄱ양(8)은 담임교사 ㄴ씨에 의해 수차례 성추행을 당했다. ㄴ씨는 착한 일을 했으니 칭찬을 해주겠다며 아이를 교실에 혼자 남도록 지시했고, 학용품을 주겠다고 집 앞에 찾아가기도 했다. 2년에 걸쳐 교실과 자동차 안에서 성추행 및 유사성행위가 이어졌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 아동의 영상녹화 진술이 법정에 제출돼 유죄의 증거로 사용됐다. 대법원은 ㄴ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ㄴ씨는 진술 영상이 증거로 사용된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성폭력 범죄에서 피해자의 진술은 사건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인데, 영상물로 이 증거가 대체될 경우 반대신문을 할 수 없다는 게 청구인 ㄴ씨의 주장이었다.

2021년 12월23일, 헌재는 ㄴ씨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30조 6항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헌재가 ‘헌법불합치’가 아닌 ‘단순 위헌’을 결정함에 따라 해당 법 조항은 즉시 효력을 상실했다.

미성년 피해자는 이미 법정에 서왔다

 

 

이번 위헌 결정은 현재 소송 중인 사건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다. ㄴ씨가 재심을 청구하게 될 경우 위헌 결정 취지에 따라 피해 아동 ㄱ양이 법정에 나와 반대신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계부에게 5년간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고발해 2021년 재판을 마친 최정연씨(가명·현재 20세)에게 실제 일어난 일이다. 대법원에서 징역 9년을 선고받은 가해자가 위헌 결정 이후 재심을 청구했다. 정연씨는 얼마 전 다시 재판이 시작될 거라는 연락을 받았다. 다시 그 기억을 꺼내고 사람들 앞에서 낱낱이 설명해야 한다.

 

조현주 피해자 국선 전담변호사는 이번 위헌 결정이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없이 나온 점이 가장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법정에서는 ‘증인과 피해자는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전제로 질문한다. 형사소송법에 증인을 다그치거나 윽박지르거나 모욕하면 안 된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을 이유로 피고인 변호사의 반대신문을 제한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동 성범죄 피해자가 법정에 서는 순간 2차 가해가 시작된다.”

형사재판은 피고인이 실제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가리고, 유죄로 인정될 경우 형벌을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국가형벌권의 남용을 막기 위해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무죄추정의 원칙도 형법의 근간을 이루는 법리다. 다만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소송의 주체가 아닌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기 위한 조력인으로만 취급되어왔다. 피해자가 수사·재판 과정에서 받게 되는 2차 피해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진술 영상이 증거로 사용되는 것이 위헌이 아니던 지난해 12월23일 이전엔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자가 법정에 서는 경우가 차단되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피고인이 요청하면 아동·청소년도 법정에 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특히 통상 16세 이상 피해자들은 영상 진술을 한 이후에도 법정 출석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았다. 형사소송법 제294조, 제295조에 따라 피고인 및 변호인의 신청 또는 직권으로 피해 아동을 소환하여 신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위헌 결정에서 소수의견(헌재 판결에 대한 반대 의견 혹은 논리가 다른 별개 의견)을 낸 재판관(이선애·이영진·이미선 재판관)들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은 헌법의 기본권이 아님에도 반대신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라고 지적했다(위 〈그림〉 참조).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그동안 아동·청소년 피해자가 임신 중이든, 외국에 이민을 간 경우든, 정신질환으로 치료 중이든, 자살 충동을 느끼는 위험한 상태든 재판부는 거의 대부분 피해자들을 법정에 출석시켰다”라고 말했다. “이번 위헌 결정의 주된 근거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인데, 이것은 실무 현장에서 이미 충분히 보장되고 있었다. 여기에 열 여덟 해 동안 유지돼오던 영상녹화 진술 제도까지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허무한 조치다.”

 

헌재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 6인(유남석·이석태·이은애·이종석·김기영·문형배 재판관)은 “미성년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하는 것은 중요한 공익에 해당한다”라고 명시하면서도 영상녹화 진술 제도의 증거효력을 인정한 해당 법 조항 때문에 “피고인의 방어권이 사실상 무력화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재판관들은 “피고인(가해자)의 원진술자(피해자)에 대한 반대신문권 행사 자체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그 재판 결과를 피고인에게 설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피해자 본인을 위한 것일 수도 없다”라는 논리를 폈다.

2013년, 헌재는 정반대 논리로 해당 법 조항에 합헌 결정을 내렸다. “아동의 진술은, 암시에 취약하고 기억과 인지능력의 한계로 인해 기억과 진술이 왜곡될 가능성이 큰 특수성이 있으므로 법정에서의 반대신문보다는 사건 초기의 생생한 진술을 그대로 보전한 영상녹화물을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더 효과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