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개선

[제도개선] 어린 피해자의 트라우마 헤집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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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1-03 04:03 조회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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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860.html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진술 영상, 법정에서 증거로 못 쓴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로서 고등학생 때 가해자 형사재판에 증인으로 선 적이 있는 이선희(가명·24)씨는 2021년 12월23일 이런 뉴스를 접하고 분노했다. 헌법재판소는 이날 미성년 피해자의 진술이 담긴 영상물을 피해자의 법정 증언 없이 증거로 쓸 수 있게 한 법률(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30조 6항)을 6 대 3 의견으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까지 미성년 피해자는 법정에 거듭 불려나오지 않아도 됐다. 수사 단계에서 영상 녹화 조사를 받으면 그 영상물을 증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재 결정으로 가해자가 영상물을 증거로 쓰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피해자들은 꼼짝없이 법정에 불려나가게 됐다. 여성단체와 법조계에서 두루 비판이 쏟아졌다.

피해 사실 의심받고 모욕당하고

형사소송 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라 주변인의 위치에 머무른다. 국가의 형벌권과 피고인의 방어권이 대립하는 가운데 피해자는 일종의 ‘증거’로서만 존재한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는 진술의 진위를 의심받고 모욕당하기도 한다. 설명하거나 설득하는 부담도 짊어진다. 위헌이라고 결정된 해당 법 조항은 최소한 미성년 피해자만큼은 성인 피해자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에서 만들어졌다.

아동·청소년보호단체 탁틴내일의 이현숙 대표는 “미성년 피해자가 수사 단계에서 영상 녹화 진술을 마치고 치유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수사·재판에 거듭 불려나가게 되면 모든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 사건 속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피해 사실이 있은 날로부터 시간이 흘러 일관된 기억을 하지 못하거나 낯선 장소에서 변호인의 공격적인 질문을 받아 형사절차를 중도 포기하는 일도 발생한다”고 말했다.

 

현장은 과도기에 있다. 4월7일 대법원 법원행정처와 여성가족부는 영상 증인 신문 시범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법정이 아닌 해바라기센터에서 영상 중계로 증인신문을 하겠다는 것이다. 재판부가 소송지휘권을 적극 행사해 추가 피해를 막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지만, 이는 해당 조항을 대체할 법이 마련될 때까지 법정에 출석할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단기 조처일 뿐이다.

그리고 4월14일 법무부가 대체입법안을 발표했다. 미성년 피해자가 아동친화적인 별도의 장소에서 훈련받은 전문조사관에게 진술하고 가해자 쪽 변호인을 비롯한 소송관계자들은 법정에서 영상을 통해 참관하도록 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변호인은 조사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질문하게 해 공격적인 신문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한편, 트라우마 등으로 법정 진술이 불가능하면 영상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특례를 뒀다. 범죄 피해아동에게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아동친화적인 장소에서 제공하는 북유럽의 바르나후스(아동의 집) 모델을 참고했다.

법무부의 대체입법안은 아직 밑그림 단계다. 충분한 예산을 확보해 전문성을 갖춘 조사관과 아동친화적인 장소 등을 확충해야 하는 만큼 어느 정도 현실화될지 미지수다.

게다가 이 같은 대안은 모두 피해아동에게 피고인의 반대신문을 피해갈 길을 마련해주지 못하고 여전히 추가 피해의 위험부담을 짊어지운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아동권익 보호 전문가들은 원칙적으로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행사하도록 하되 반드시 예외 영역을 두어 피해아동을 보호할 길을 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더해, 피해아동이 불가피하게 피고인의 반대신문에 응해야 할 때도 언제, 어디서, 어떤 절차를 거칠지 아동친화적인 지침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원칙-예외의 방식은)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와 맞물려 시너지도 낼 수 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피해자 상태를 면밀히 살펴 반대신문권의 예외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재판부가 ‘이 정도면 불러도 되겠다’ ‘이 정도는 부르면 안 되겠다’고 판단해나가면, 그런 기준들이 일종의 판례군처럼 형성돼 법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헌법에 반대신문권이 보장된 미국의 경우, 아동 피해 사건은 대부분 플리바게닝(감형 협상) 단계에서 끝나기 때문에 아동 피해자가 법정에 서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 또한 아동이 두려움 때문에 증언할 수 없거나 증언으로 인해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가 인정할 때 영상물로 피고인의 반대신문을 대신하는 8가지 예외를 뒀다.